지난 11월 23일 종영한 JTBC 드라마 <나의 나라>에서는 조선왕실 최대 비극 중 하나인 이성계·이방원의 부자 갈등이 비중 있게 묘사됐다. 건국 6년 만인 1398년에 다섯째아들 이방원한테 기습을 당해 왕권을 빼앗긴 이성계가 어떻게든 분을 풀어보려고 애쓰는 장면이 드라마 후반부에서 묘사됐다.
 
이성계는 최영과 함께 고려왕조의 기둥이었다. 1388년 쿠데타인 위화도회군 전까지 32년간이나 고려왕조 수호에 앞장섰다. 몽골군·홍건적·여진족·왜구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했을 뿐 아니라 내란까지 막아내며 왕조를 지켜냈다.
 
그랬던 그가 1388년에 쿠데타를 벌인 데 이어 우왕·창왕·공양왕을 연달아 폐위시킨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막판 4년 동안, 4차례나 임금을 배신했던 것이다. 32년간 한 번도 안 했던 일인데다가 임금을 배신하는 일이었으니, 세상의 비난도 비난이지만 그 자신의 심적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현대인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과 옛날 사람이 쿠데타를 일으키는 것은 외형상으로는 비슷하지만 내용 면에서는 달랐다. 왕조시대에는 ‘임금은 하늘이 내리는 거룩한 존재’라는 인식이 지배했다. 그렇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키는 사람은 단순히 정권을 빼앗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하늘로부터 새로운 명을 받았다는 점을 백성들에게 어떻게든 납득시켜야 했다.
 
또 임금이 ‘더 큰 부모’로 인식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임금을 거역하려 할 때는 자기 행동을 합리화할 명분을 갖춰야 했다. 오늘날의 쿠데타에도 명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옛날에는 훨씬 더 그랬다.
 
그런 과정을 거쳐 새 나라를 세운 이성계였다. 그런데 불과 6년 만에 고려 왕실의 왕씨도 아니고 제3의 귀족도 아닌, 엉뚱하게도 자기 아들한테 왕권을 빼앗겼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크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방원이 아버지를 상왕으로 추대하긴 했지만, 그것은 실질 없는 허상에 불과했다.
 
그랬기 때문에 다섯째 아들에 대한 이성계의 분노와 배신감은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나의 나라>에서 이미지 강한 두 배우인 김영철과 장혁이 각각 이성계와 이방원을 맡아 부자 갈등을 치열하게 묘사한 것처럼, 실제의 이성계·이방원도 그처럼 치열한 대립 양상을 보였다.
  

 
그 점을 잘 반영하는 게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고사다. 영조 임금 때인 1751년 실학자 이중환이 지방 답사를 기초로 저술한 <택리지>는 함흥 땅에서 전해지는 이 고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태조 정축년에 신덕왕후 강씨가 승하하자 공정대왕(恭定大王, 이방원)은 하륜의 계책대로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의 난을 평정했다. 그와 동시에 세자 이방석이 세자 지위를 내놓았지만, 그의 형 방번과 함께 목숨을 잃고 말았다. 태조가 크게 분노해 공정대왕(恭靖大王,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다음, 측근 신하를 거느리고 함흥으로 가버렸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공정대왕(정종)이 공정대왕(이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공정대왕(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뒤, 태조에게 귀환을 요청하는 사신을 보내면 가는 대로 모조리 베어 죽였다. 이러기를 10년이나 했다.”

 
이방원은 묘호(사당 명칭)는 태종이지만 시호는 공정대왕이었다. 형인 정종의 시호도 공정대왕이었지만, ‘정’의 한자가 달랐다. 그리고 이방원이 아버지에게 보낸 사람이 ‘사신’이라 불린 것은, 도성 밖으로 나가 공식적으로 임금의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은 사신으로 불렸기 때문이다. 꼭 외국에 나가야만 사신으로 불렸던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위의 글을 읽을 때 주의할 게 있다. ‘이방원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지 않고 ‘이방원이 정도전의 난을 평정했다’고 기술한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위 글이 권력투쟁의 승자인 이방원의 관점을 편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읽어야 한다.
 
아들한테 배신당한 이성계가 고향 함주(함흥)로 돌아간 뒤 아들의 사신들을 번번이 죽였다는 이 고사는 당시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훗날 이 고사는 심부름 간 사람이 소식이 없거나 회답이 오지 않을 때를 가리키는 의미로 쓰이게 됐다.
  

 
이 이야기는 이성계와 이방원의 부자관계를 설명하는 데 많이 사용되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이 고사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아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아들의 사신들을 죽여버렸다는 것은 조정 신하를 하인처럼 생각하던 왕조시대의 산물이다.
 
남자 노예를 가리켰던 신(臣)이란 한자가 ‘신하’란 글자에 들어간 데서도 그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신하는 왕의 노예나 마찬가지로 군주가 마음대로 죽여도 된다는 봉건적 관념이 함흥차사 고사에 묻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고사를 언급할 때는 이성계·이방원 부자관계뿐 아니라 전근대적인 인권 관념도 함께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애꿎는 사람들을 해치는 것으로써 계속 표출되던 이성계의 분노는 무학대사라는 인물의 등장과 함께 결국 종결을 맺게 된다. 이성계가 죽일 수도 없고 안 만날 수도 없는 인물이 함주에 타나면서 마침표가 찍어진 것이다.
 
고려 공민왕 아들인 우왕(재위 1374~1388년) 때부터 불교계 지도자로 부각된 무학대사는 우왕이 제안한 왕사(王師) 자리를 고사했다. 그 시기에 그는 이성계가 향후 임금이 될 거라는 예언을 한 적이 있다. 이것이 왕사 직을 고사한 동기 중 하나와 관련됐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서산대사가 지은 <설봉산 석왕사기>에 따르면, 위화도 회군이 있기 4년 전인 1388년에 무학대사는 원산 남쪽 안변군에 위치한 사찰에서 장군 이성계의 꿈을 풀이해줬다. 무학대사는 “장차 왕이 될 꿈”이라고 해몽했다. ‘왕이 될 꿈이라고 해석해준 사찰’이라는 의미에서 이 절은 그 뒤 석왕사(釋王寺)로 불리게 됐다.
 
이성계 같은 유명인에게 그런 해몽을 해주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다. 고려왕실 왕사를 포기한 저명한 승려가 저명한 장군한테 “당신이 왕이 될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은 대단한 정치적 모험이었다. 무학대사가 이성계에게 거는 기대가 어느 정도였는지 느끼게 해주는 사례다.
 
그 같은 모험을 감행한 적이 있는 데다가 조선 건국에도 협조한 무학대사였다. 그런 인물이 함주에 몸소 찾아왔으니 이성계로서는 난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신이 왔다면 “칼을 어디다 뒀나?” 하며 두리번거리기라도 했겠지만, 이때는 사정이 달랐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에 따르면,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당신도 나를 달래려 왔군요”라고 말했다. 이성계가 옛 주군이기는 하지만, 무학대사는 불교계 지도자인 데다가 나이가 여덟 살 많았으므로, 한자로 기록된 두 사람의 대화를 이렇게 번역할 수밖에 없다. 일부 서적처럼 이성계가 하대하는 식으로 이 대화를 번역할 수는 없다.
 
약간 빈정대는 듯한 인사를 듣고 무학대사는 “전하께서는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라면서 “빈도가 전하와 함께 알고 지낸 지가 수십 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러 왔을 뿐입니다”라며 안심시켰다. 그 뒤 무학은 수십 일을 함께 지내면서 이방원의 단점만 계속 언급했다. 이성계 앞에서 남의 집 아들 흉을 계속 본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이성계의 감정을 건드리는 말을 던졌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으로 아들들이 대거 죽은 이 마당에 이방원 말고 누구한테 왕업을 물려주겠느냐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한 뒤, 무학은 스님답지 않은 말을 꺼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무학은 “남한테 맡기는 것보다 내 혈육한테 주는 게 나으니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라며 이성계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결국 이성계는 생각이 바뀌었다. 함흥 생활을 청산하고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때가 1402년이다. <택리지>에서는 함흥차사가 10년간이나 계속된 듯 기술했지만, 옛날 사람들의 과장법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2년 만에 끝났다.
 
67세 나이로 한양에 귀환한 이성계는 여생을 불도 연마에 바쳤다. 그러다가 1408년 73세 나이로 세상을 하직했다. 결국, 아들 곁에서 눈을 감은 것이다. 아들에 대한 분노 때문에 방문객들을 죄다 죽였다는 함흥차사 이야기는 이렇게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세상 이치를 환기시키는 방향으로 결말을 맺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