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했던 일요일 저녁, 세종문화회관에는 바깥 세상과 무관하게 깊고 신비로운 동굴 하나가 열렸다. 그곳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와, 어둠과 빛의 조화, 조곤조곤한 이야기들은 그 안의 사람들을 꿈결처럼 매료시켰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2019 김동률 콘서트 <오래된 노래> 현장을 전한다.

아낌없이 주는 목소리  
 

  
어스름히 비치는 빛의 장막 뒤에서 노래 하나가 흘러나왔다. 정적의 한가운데서 피아노 소리가 흐르다 첫 음성이 터지는 순간 동굴의 어둠이 빛으로 환해지는 듯, 따스함이 확 피어났다. 피아노를 치며 그가 들려준 첫 곡은 ‘그림자’였다.

김동률은 오프닝 무대 후 인사를 건네며,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근사한 공간에서 공연하게 된 배경과 소감을 먼저 이야기했다. “공연준비에 1년 정도가 걸리는데 3~4회 쯤 돼서 이제 좀 할 만하다 싶으면 무대가 해체돼서 아쉽더라”고 털어놓은 그는 “한 공간에서 오래 공연을 해야지만 시도할 수 있는 무대연출이 있는데 그걸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이 공연에 그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웰 메이드 무대였다. 깊고 웅장한 김동률의 목소리에 딱 어울리는 공간이 꿈 속에 있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무대의 완성은 역시 그의 목소리였다. 김동률의 목소리는 나무 같았다. 항상 그 자리에, 오래 있었을 것 같은 목소리. 어두운 동굴을 지키며 서서 누군가가 필요로 할 때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주는 나무. 관객은 그의 목소리에 숨죽이고 귀 기울였다. 수많은 악기들을 뚫고 나오는 저음은 마치 하나의 악기 소리 같았다.
 
특별한 무대, 특별한 선곡
 

“(노래한 지) 25년이 됐더라. 많이 했네 싶었다. 그럼에도 무대는 늘 어렵고 편하지 않는데 이 점이 참 다행인 것 같다. 어렵기 때문에 겸손할 수 있고, 그런 아쉬움이 연료가 돼서 다음에 더 나은 무대를 하려는 마음을 갖게 한다.”  

김동률의 공연에는 25년이라는 시간이 주는 무르익음이 배어 있었다. 특히 무대 연출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담백하면서도 과하지 않은 화려함이 세련미를 풍겼다. 가수의 얼굴을 크게 비추는 중계 화면이 아예 없었고, 무대 세트도 간결함 자체였다. 음악이 만들어내는 드라마를 조명으로 주되게 표현했기에, 오직 목소리와 빛만이 공간에 남았다. 

이런 이유로 소리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청각 위주의 공연이 만들어졌다. 시각적 요소라면 앞서 말한 조명이 거의 다였는데, 빛으로 만드는 예술작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음악을 근사하게 시각화했다. 콘서트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상화면 하나 없었지만 전혀 밋밋하지 않았던 건 공들인 조명 덕분이었다.  

선곡 또한 특별했다. 널리 알려진 히트곡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은 명곡들이 조화롭게 섞여 있었다. ‘취중진담’, ‘아이처럼’, ‘사랑한다는 말’과 같은 익숙한 곡들부터 ‘Nobody’, ‘데자뷰’, ‘연극’ 등 반가운 곡들까지 두루두루 풍성했다.  
 
“‘취중진담’은 저의 3대 히트곡 중 하나인데 언제부턴가 이 곡을 부르는 게 쑥스럽더라. 제가 23살 때 이 노래를 만들었는데, 저만 나이 들고 노래는 나이가 안 들잖나. 어렸을 땐 ‘내가 고백하면 다 잘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부른 ‘취중진담’이었다면, 요즘에 부르는 어덜트 버전은 안 될 거 뻔히 알면서 고백하는 버전이랄까.”

그의 위트 넘치는 고백에 객석에선 큰 웃음이 터졌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전하는 재치 있는 입담이 이렇듯 관객을 자주 웃게 했다. ‘Nobody’를 부른 후 곡에 얽힌 얘기를 할 땐, “원더걸스의 ‘노바디’에 밀려서 주목받지 못했다”며 웃픈 비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다분히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이날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고민의 여지없이 ‘잔향’이었다. 제목처럼 잔향이, 그 여운이 무척이나 길게 남는 무대였다. 김동률은 “‘잔향’은 제 노래 중 특별히 좋아하는 3대 곡인데, 다른 신곡 때문에 밀렸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작정하고 ‘잔향’을 준비하고 불렀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작정했다’는 표현에 고개가 끄덕여질 만큼 오케스트라와 보컬이 빚어내는 하모니가 대단했다.

특별한 손님, 특별한 앙코르 
 

이날 공연 내내 피아노를 맡은 연주자는 특별한 이였는데, 바로 멜로망스의 키보드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정동환이었다. 공연 초반, 마주 놓인 그랜드 피아노에 정동환과 김동률이 앉아 함께 연주하는 모습은 꼭 영화 속 장면 같았다.

또한 김동률과 가까운 친구인 피아니스트 김정원의 등장도 객석을 깜짝 놀라게 했다. 김정원은 ‘여름의 끝자락’과 ‘청원’을 연주했고 그의 반주에 맞춰 김동률은 노래했다. 천의무봉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매회 공연마다 자발적으로 동행 중이라는 김정원은 “출근하는 기분”이라고 너스레를 떨며 김동률 못지 않은 입담을 과시했다. 김정원은 브람스와 슈만의 곡을 각각 연주하며 보다 오래된 음악의 아름다움 속으로 관객을 초대했다. 김동률의 공연에서 클래식을, 그것도 유명 피아니스트로부터 직접 듣는 건 예상하지 못한 시나리오였기에 감동이었다.

동굴의 깊고 깊은 곳까지 들어갔을 때, 어느덧 공연의 끝자락이었다. 마지막 무대는 특히나 강렬했는데, 모든 연주자가 퇴장하고 무대 가운데 김동률 혼자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독무대였다. 조명 아래 선 그가 더욱 나무처럼 보였다. 더불어, 합창으로 꾸며진 ‘동반자’ 등의 앙코르 무대 역시 공연의 끝을 아쉬워하는 관객에게 아쉬움 없을 위로와 선물이 되었다.

“조금만 더 멋지게, 조금만 더 늙어서 우리 다시 만나요.”

김동률다운 끝인사였다. 공연의 막이 내리자 객석에선 기립 박수가 터졌다. 1층부터 3층까지 거의 모든 이들이 일어섰다. 앉아 있는 사람들도 일제히 머리 위로 손을 올리고 박수치며 그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김동률은 이날 자신의 진심을, 따뜻한 마음을 한결같은 목소리에 담아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주었다. 김동률을, 김동률의 목소리를, 김동률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낌없이 주는 나무 한 그루를 자신의 동굴 속에 비밀스레 심어놓은 이들이다. 그 나무를 품은 사람들의 표정은 쌀쌀한 밤바람과 무관하게 따뜻하고 평화로웠다.